주기도문 강해

목차

주기도문 강해(1)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9∼13절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해서 이것을 <주기도(The Lord’s Prayer)>라고 합니다.

<주기도>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주기도>는 마태복음보다 좀 짧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앞부분에서 ‘성도들이 피해야 할 기도의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외식(外飾)과 중언부언(重言復言)입니다.

외식(外飾)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위선자들이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얘수남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은 이교도들이 하는 주문형태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교도처럼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는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다고하더라도 이 말씀이 반복적인 기도와 긴 기도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응답이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긴 시간을 산에서, 들에서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금한 것은 이교도처럼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 말라는 것이고,  그런 기도는 응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과 신뢰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기도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정성을 드리고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타종교에서 주문을 외우거나 정성을 드려서 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성을 드리지 않아도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을 드려서 하나님을 설득해서 내 요구를 들어달라고 떼를 쓰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기도의 모범을 <주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첫부분에서 나왔듯이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기도가 성도들이 드려야 할 “기도의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그 내용이 짧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모든 원리와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를 깊숙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주기도>는 덧붙이거나 뺄 것이 없는 온전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직접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이 <기도>가 제자들만 하라는 기도는 아닙니다.

이 <기도>는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의 내용은 제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사람이 드려야 할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배우는 사람들은 배우려는 운동의 기초 자세를 익히기 위해서 기본이 되는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모범이 되는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이유가 모엇입니까?

그것은 그 동안 그들이 가져왔던 잘못된 습관이나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이러한 과정은 힘은 들지만 매우 유익하며, 꼭 필요합니다.

물론 운동을 배울 때에 마구잡이로 대충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 큰 차이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기초를 잘 다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지만, 대충 배운 사람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성장을 할 수 없는 한계에 이릅니다.

이러한 원리가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주기도>는 우리가 익혀야 할 기도의 기초이며, 모범입니다.

기도하는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주기도>입니다.

그동안 내 방법대로 하던 잘못된 기도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 <주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를 깊이 이해하고, 그 원리를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기도의 모범이 없어도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기도의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기도의 태도와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주기도문과는 달리,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주기도>의 모범을 따라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위한 기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아버지’라고 부르고 난 후에 마치 리스트를 작성해 놓은 듯이 자신의 필요만을 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어린이가 산에서 곰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도망갈 수도 없어서 아이는 그 자리에 꿇어 앉아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이 곰에게 착한 마음을 주세요.”

그리고 눈을 떠보니 곰도 마주 앉아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소년은 자신의 기도가 금방 응답이 된 줄로 믿고

“이렇게 빨리 응답해 주시니 너무도 놀라운 걸”하고 기뻐하니까, 곰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너는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몰라도, 나는 지금 식사기도를 한거야”

이 이야기 속에는 기도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나만을 위한 기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나 물질, 재능이나 젊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잘 키워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관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분명한 인생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에서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특히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옴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불러 3년동안 가르치셨습니다.

각처에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주장사의 비유,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가라지 비유 등등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하늘나라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러 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오로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가정을 다스려 주시고 우리 모임을 다스려 주시고, 이 나라와 전 세계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 이후 사단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곳에는 다툼과 분열과 거짓과 음란과 파괴와 살인 강포와 부정부패가 난무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할 때, 그곳에 생명과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할 때, 그곳에 용서와 사랑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할 때, 그곳에 공평과 정의가 넘쳐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족함이 없는 환경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불행한 것은 사단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마귀를 멸하려고 오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이렇게 사단에게 빼앗긴 영역을 되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땅 끝까지 회복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습니다.

3. 우리를 위한 기도

둘째로,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가르치신 후 다음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1∼13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흔히 우리는 영적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막상 자신의 먹고 사는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칫 영적인 신앙생활과 현실의 생활이 다른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그 일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 한 병을 통해 엘리야를 먹이셨듯이 인간이 기도를 드릴 때 그것에 응답하여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심으로써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다.

부모들은 자식의 필요가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녀들이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좋아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구하는 행위를 좋아하시며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2년 간 준비 끝에 1948년 8월8일 켈커타로 향했습니다.

당시 그녀의 손에는 한 권의 성경책과 한 벌의 수녀복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드렸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한 벌의 옷이 해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일 아침 어디서 먹을지 나는 모르고 떠납니다. 내 일생을 당신께 부탁합니다”

그 후 30년 동안. 테레사 수녀는 100곳에 고아원을 세우고 가난한 자와 불쌍한 고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영적인 복음역사에도 관심이 많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육신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도와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일용할 양식은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의식주를 비롯해서 이 땅에서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가정 문제, 취직 문제, 장래 문제 등등이 다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현실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육신의 양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육신을 위한 기도라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은 영혼을 위한 기도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 살면 자유롭고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이 살 때 사람은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고 삶을 낭비하게 됩니다.

또한 죄는 사람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도덕성을 마비시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죄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의지력과 절제력을 잃게 하고 감정과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무엇보다도 죄는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여 어둡고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갖게 합니다.

죄가 사람에게 주는 해독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문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 죄에 대한 기도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절).

자기는 용서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용서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를 결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기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시험에 들지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 세상은 죄악의 도성입니다. 또한 사단은 지극히 악합니다.

반면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죄악 된 육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쉼 없이 이 세상의 유혹을 받고, 끊임없이 사단의 시험을 당합니다.

사단은 세상의 불신자들이야 언제든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으니까 내버려 두지만 신자들은 쓰러뜨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정욕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물질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육신의 안일과 세상 명예를 통해서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단의 유혹과 시험 앞에 연약한 자신을 인정하고 겸손히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기초해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안되거나 할 줄 모르면 주기도로 기도하십시오. 주기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랍고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주기도로 승리한 이대영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1921년 신학교 졸업)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목회하셨는데, 은퇴하실 때까지 새벽마다 300번씩 주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평생 이렇게 신앙생활을 한 것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일제 강점기때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옥중생활을 하면서 매일 금식하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벽에다 몸을 의지하고 하루 5,000번씩 주기도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일제는 겁을 먹고 목사님을 석방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기도>에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모든 원리와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는 덧붙이거나 뺄 것이 없는 온전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로 기도하십시오. 평안!

주기도문 강해(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9〜13절 –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는 허공에다 대고 막연히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 속에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정의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높은데 계신 분입니다.

지극히 높은데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하늘이 언제나 땅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을 초월합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을 덮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낡고 늙고 변하고 닳아 없어집니다.

아무리 훌륭한 나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제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계신 아버지가 아무리 인자하고 자상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 할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을 넘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변치 않습니다.

그 분의 능력은 쇠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나라가 영원하고 그 권세가 영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태양이 뜰 수 없고 비가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바람이 불 수도 없고 계절이 바뀔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9∼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중에 누구도 오늘 하루 숨 쉬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정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엇하나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온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그 높이만큼 보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넓게 더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늘보다 높은 곳은 없습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높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서 온 세상을 바라보시고 하늘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두루 살피시며 하늘에서 우리의 깊은 중심까지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이든 사나운 짐승이 몰려다니는 광야이든,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며 우리의 이성과 생각을 초월해 계시고, 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오늘도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그 하나님께 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전혀 동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닿을 수 없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라고 해서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상대하시지도 않고 우리에게서 멀어져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고맙게도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2.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12절의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대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 즉 권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가족입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1촌 사이인 부자지간입니다. 부녀지간입니다.

가족 중에서도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람어인 “아빠(abba)”였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빠(αββα, abba)아버지”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로마서 8장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갈라디아서 4장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가장 가까운데 계신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애원하고 부탁하고 아빠라고 부를 때,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아람어 아빠(abba)는 우리말 ‘아빠’와 발음이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버지를 어린아이가 표현할 때 아빠라고 합니다.

보통 성인이 되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라고 부르면 좀 더 친밀감이 넘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는 용어로 ‘아빠 아버지(αββα πατήρ, 아빠 파테르)라고 불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아바”라는 단어는 이미 ‘아버지’를 호칭하는 모든 연령대의 공통된 용어로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시대에 ‘아빠’ 호칭을 어린아이의 재잘거리는 ‘아빠’ 표현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친밀한 호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친밀감보다 앞서는 당시의 의미는 가족 내의 절대 권력입니다.

즉, 불순종하는 자식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지닐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의무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부장으로서 아버지가 결코 독재자나 폭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권력을 지닌 동시에 가족 전체를 위한 희생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사회의 아버지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사회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대부(God-father)적인 보호자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부르더워졌지만, 옛날 우리 사회에서도 <아버지>는 무섭고 절대 순종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나를 절대적으로 보호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겟네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특별한 아버지, 절대적 보호자이신 같은 아버지로 강렬하게 체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느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체험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셔서 예수님은 무덤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고 기도하실 때에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는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제자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빌립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늘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과 언제나 인격적으로 교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만 동시에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가장 가까운데 계신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애원하고 부탁하고 아빠라고 부를 때,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위험한 처지에 처할 때 우리를 건져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할 때 아버지께서 말하듯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이처럼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본래부터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힘이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있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전에는 우리도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2:3).

그런데 어떻게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희생은 계속되었습니다.

아빠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그 희생의 대가가 아무리 크고 혹독하다 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십니다.

아빠 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을 위해 끝도 없이 희생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들판은 광야입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굶주린 맹수들이 먹잇감을 찾기 위해 눈을 번뜩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고작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굶주린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광야에,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둔다는 것은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것은 그 양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그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목자는 자신의 시간을 소비합니다.

정력을 허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자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놔두는 모험을 합니다.

목자가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목자는 아빠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체면도 몰수합니다.

당신의 보좌도 내팽개칩니다.

당신의 아들도, 아니 아들의 생명도 기꺼이 희생하시면서 한 마리 같은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아빠이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찬양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아빠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입니다.

. 우리는 서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했던 그 누군가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희생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언약공동체인 교회의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을 지양하고 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개인주의의 집단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반드시 공동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동체를 살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교회를 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과 굶주림으로 배고파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떡을 던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우리 교회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평안!

주기도문 강해(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9〜13절 –

창세기 32장(22절∼32절)에는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아내와 아들 등 일행 모두를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만 남습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낯선 사람 즉, 천사가 나타나고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천사는 야곱이 완강하게 버티자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주어라.”

그러나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이에 천사가 말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래, 이제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과거 도망자, 거짓말쟁이, 사기꾼, 꼼수를 부리던 야곱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와 작당하여 형 에서를 속이고,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이었습니다.

아내와 재물을 얻기 위해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이 넘게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야곱이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야곱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만져주시고, 새 이름을 통해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름은 참 중요합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인격, 명예, 생애 등이 걸려 있습니다.

이름을 통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활 속에서 늘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이 안 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이름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서 회사 이름이나 자신의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짝퉁’은 잘나가는 회사나 그 제품을 모방하거나 이름을 사용해서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짝퉁에 속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제품의 질을 보면 잘못된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이름이란 단지 부르는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십계명의 3번째 계명에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24장16절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고 할 때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애굽기 3장1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 I am that I am).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에게 나타난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영어로는 “I am that I am”이라고 하는데,

“나는 곧 나다.” “나는 있으니까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내 스스로 존재하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한 마디는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더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절대적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나는 너희가 찾거나 불러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 너희 조상 적부터 너희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無)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수많은 귀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기뻐 찬양해야 할 분이고, 우리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저 무릎 꿇고 떨면서 굴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유물론자들은 우리의 두려움(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이전부터 계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4절과 8절, 2장 8절에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라고 하셨고,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며 마지막이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또 현재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계시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므로 우리는 그분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 의존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궁극적인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길이고, 너희의 진리이고, 너희의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백지수표와 같은 분이십니다.

“I am that I am”은 “나는 네가 필요한 그 무엇이다.”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절)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히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이셨고 그의 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원하는 모든 것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로 번역됩니다.

히브리어로는 ‘야훼(야웨)’로 발음됩니다.

(히브리어: יהוה, 영어: Yahweh)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로 영어로 “I am that I am”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는 다른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시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앞서는 다른 실재도 없습니다.

영원 전에는 공간도, 우주도, 공허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진리에 부합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실재이자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의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우리의 흥미와 주목과 찬양과 즐거움을 얻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존재 자체가 구별되어 드러나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온 세계에 드러나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본래 영광스럽습니다.

본래 영광스럽고 거룩하기 때문에 다시 거룩해져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하고 또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자기 눈을 가리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카데쉬(קדשׁ)라고 합니다.

‘카데쉬’ 는「칼로 베어서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칼로 베어서 잘라내면 구별되고, 그래서 거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일을, 그리고 예배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잘라내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주신 물질적 축복 중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구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입으로 들어오는 모든 악한 것을 구별하고 있습니까?”

“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들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나는 말씀대로 구별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 잘라낸다고 하는 말이 그대로 내 삶에 적용이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청교도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대부분의 지역 교회에서 그를 그 교회 회원으로 받아 드리기 위하여 교회 위원회와 입교 문답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론 이 자매는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장로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 다음에 자매가 했던 대답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a sinner running after sin),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a sinner running from sin)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십니까?

그리스도인라고 죄 문제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를 믿고 그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은 확실한 성경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죄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오히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넘어뜨리고자 더욱 집요하게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예로부터 이 과정을 가르쳐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라고 불렀습니다.

레위기 19장2절에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거룩, 공의, 자비, 긍휼, 사랑 등 다양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품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공의가 있고 자비가 있고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결코 스스로 거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도 하나님의 공의나 자비, 혹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이사야 6장 1∼3절 –

그렇습니다.

천사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찬양했던 것은 오직 하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였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혼탁한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며, 모든 만물들이 경배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반드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에 반드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우리의 실생활(말,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아 나쁜 영향력을 끼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됩니다.

‘너 하나님 믿는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해!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

“저 친구 예수 믿는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누가 보든 안 보든 진실되게 살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폴란드의 음악가 쇼팽은 20살에 예술의 나라 불란서로 유학을 떠날 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런 부탁을 했답니다.“너는 폴란드의 자랑이 되어다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속에 국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쇼팽의 선생님 역시 조그마한 은컵에다 폴란드의 흙을 넣어 정성스럽게 싸서 그에게 주며 “어디를 가든지 조국을 잊지 말라. 이 한 줌의 흙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기 바란다”며 선물을 주었습니다. 쇼팽은 공부하는 동안 힘들 때마다 “나는 폴란드 사람이다. 폴란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지” 하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폴란드의 이름을 높이며 살았습니다. 그의 유언은 “나의 폴란드 흙이 담긴 이 컵을 나의 무덤 속에 넣어주오”라고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죽었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구체적인 삶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꼭 이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익을 보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면 안 됩니다.

지금 지구상에 한쪽에서는 너무 먹어 비만증에 시달려 살을 빼고자 피나는 투쟁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떠나 서로 나누어 먹는 나눔의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모두 도와준다고 합니다.

유태인으로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 선민으로서의 망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서로 도와가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가난한 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해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평안!

주기도문 강해(4) 나라가 임하시오며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누가복음 17장 20〜21절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 17절 –

오늘 우리는 주님의 기도 가운데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천국(天國)’하면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 “예수 믿고 꼭 천국에 함께 가자”고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일어서십시오.”

모두들 일어섰는데 맨 앞자리에 앉은 한 집사님만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천국에 가고 싶지 않는 겁니까?”

그러자 그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해습니다.

“아니요,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가기 싶어요. 죽으면 가야지요.“

이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천국간다”는 말은 ‘죽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국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믿는 자가 죽었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신앙적인 소망을 담아 생전에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었으니 죽은 후에는 죽음의 세력에서 건짐 받아 죄와 죽음과 질병의 세력에서 자유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지요.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죽어야만 가는 곳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사후(死後) 세계로만 생각하면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그 의미는 ‘하나님 죽고 싶습니다. 죽어서 천국가고 싶습니다.’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도 갈 수 있지만 살아서도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살면서도 누릴 수 있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來世)적이면서 동시 현세적(現世的)이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세 가지 있습니다.

(1)하나님의 이름

(2)하나님의 나라

(3)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어를 보면 앞에 ‘당신의’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정확하게 읽으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이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천국에 대한 개념은 불교의 극락(極樂)이나 도교나 무속(巫俗)에서의 저승, 즉 황천(黃泉)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저 죽어서 가는 좋은 곳, 낙원(樂園), 파라다이스(paradise) 같은 곳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천국(天國)하면 예수 믿고 죽어서 가는 곳, 낙원, 금은보화로 가득하고 고급 맨션이 나를 위해 준비된 곳입니다.

불교(佛敎)의 극락이나 저승(儲承)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 믿어 가는 곳입니다.

성경, 특히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 정확한 의미로 하나님 나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천국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같이 어느 한 지역에 영토를 차지하거나 우리의 시공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永遠)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영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현실과 시간 속으로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비(神祕)입니다.

그 신비로운 나라가 지금 우리 속에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도의 관점은 사후(死後)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現實) 세계에 있고, 저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셨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유대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의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장2절)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천국에 대한 말씀으로 팔복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는 말씀으로 팔복을 끝내셨습니다.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열쇠도 천국의 열쇠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도, 겨자씨 비유도 모두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인 마태복음에만 천국이라는 단어가 무려 36번이나 기록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국가를 형성하는 3가지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어야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토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국가처럼 지상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걸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권입니다.

누구의 주권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도 그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은 회복을 통해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회복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회복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결핍(缺乏)입니다.

결핍이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결핍은 범죄함으로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생겼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는 이러한 결핍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는 어떠한 결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결핍이 생겼습니다.

범죄는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여자를 유혹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1∼5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고 불순종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선악과를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 되어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본질은 자기주장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절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결핍입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죽음>이라는 생명의 결핍이 찾아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의 고귀함과 거룩함의 결핍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랑과 정의로움의 결핍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온갖 거짓과 불의와 부정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고귀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랑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공의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결핍을 채우려고 한 짓이 우상숭배이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성공과 쾌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결핍이 채워집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갈증이 생기고 더 허탈해지고 더 더러움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핍은 결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리석게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더 멸망의 길로 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핍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결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주장을 합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다는 겁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납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 같았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하니 신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됩니까?

가진 것 다 떨어지고 돼지우리에서 사료를 먹는 그런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그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탕자이며 뿌리 채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 채 뽑힌 나무는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열매도 있고 잎도 무성하고 푸르니까 부족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뽑혀 있기에 그 나무는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2.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님께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임한다”는 말은 ‘엘데토’인데 영어에는 Come으로 번역하고 중국어로는 임할 림(臨)자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임해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나라가 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하는 말이 천국과 같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정말 지금 우리나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지난날에 비해 보면 너무도 좋은 건물을 짓고 온갖 좋은 시설을 갖추고 정말 천국과 같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의 내면을 보면 더 죄악이 가득하고 너무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때로는 생지옥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은 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진정한 천국이 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자기의 천국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국을 만들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헸습니다.

참으로 천국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해오시고 하나님이 다스리면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누구에게도 좋은 집을 지으라고 하거나 좋은 시설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장엄하던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다 무너뜨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8장36절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이 땅에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 집인 저 천국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임하시고 주님께서 통치하게 되면 천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도 김영삼 정부니 김대중 정부, 이명박 정부라고 하둣이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 그 어디든지 하나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하실 때 천국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재림해 오셔서 온전히 통치하실 때에 천국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결핍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서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필수적인 것이 죄 문제의 해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거듭난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결핍을 가져다 준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주장에 대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자기주장에 대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교만에 대한 회개입니다.

이 회개가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동시에 외친 것이 <죄의 회개>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장15절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자기주장이라는 죄의 회개를 통해서입니다.

회개를 한 다음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6절-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까?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 회복이 없습니다.

이 회복(回復)의 다른 말이 바로 구원(救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관계회복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병을 고치고 귀신 쫓아낸 그 현상만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핵심은 관계 회복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예수님은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마가복음 5장3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선언하셨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관계회복(關係回復)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회복으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겠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웃과의 관계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나서, 죄용서 받고 나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내가 예수님 믿어 거듭난 존재라는 증거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용서할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의 결과는 섬김과 나눔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과 관계가 확대되어 사회적으로까지 확장될 때,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마음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섬겨야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누군가와 나누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장20∼2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죄 용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로마서 14장17절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내 안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십시오.

내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누리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고되지 않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살 맛 납니다.

힘이 넘칩니다.

꿈이 생깁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복음을 순종하는 우리에게 벌써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의 날 완성될 것입니다. 평안!

주기도문 강해(5)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마태복음 6장 9〜10절 –

오늘 말씀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7장21-27절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뜻’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뜻을 알아야 하고, 가족은 가장의 뜻을 알아야 하고, 직장인은 경영주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장21∼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뜻>이란 말은 헬라어로 델레마(θέλημα)라고 읽습니다.

이 말은 “의지”, “원함”, 또는 “뜻”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하나님의 플랜(Plan)대로 하나 하나 그 계획들이 이 역사 위에 이루어져 마침내는 하나님의 최종 플랜인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뜻

세상의 구원, 성도의 성화와 풍성한 삶

그러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원하심은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로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누가복음 15장)에서 양 백 마리가 있는 목자가 그 중의 한 마리 양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목자는 잃었던 앙을 찾게되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혼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장3∼5절)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전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논의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만드셨고, 성자 하나님은 구원계획을 실행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전파하게 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이뤄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거룩-성화(聖化)입니다.

성화(Sanctification)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점차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성결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이란 개념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캐도쉬 이스라엘’(קְד֥ וֹשׁ יִשְׂרָאֵֽל)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서에서만 20번 나오는데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거룩’입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높은 보좌 위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스랍(천사)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서있습니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함으로 하늘의 군대에서 가장 높은 계급을 갖고 있습니다.

스랍들의 직무는 하나님께 찬양을 외치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가 본 스랍(Seraph·스랍이 여럿 있으면 세라핌-불타는 자) 스랍들은 날개가 여섯이 있었는데,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웠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기리었고, 나머지 둘로는 날아다니면서 서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고 노래하고 있었습니다.(이사야 6장1∼3절).

그 외치는 소리가 하늘의 성전의 문기둥들이 들썩들썩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자체였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11장4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장15절)

<거룩>은 히브리어로는 <카도쉬>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구별’, 그리고 ‘밝음’입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입니다.

죄악된 것과 조금도 섞이지 않는 ‘초월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거룩함’은 밝음입니다.

<밝음>은 더럽고 어두운 것이 없는 ‘순수함’과 ‘깨끗함’의 뜻입니다.

죄가 없는 상태입니다.

어둡고 왜곡되어 비뚤어진 것이 없는 ‘온전함’입니다.

그래서 그것은‘영광’입니다.

밝은 빛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고보서 1장17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거룩함은 꼼짝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道)를 닦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은 그냥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대로 진실하게 정상으로 유쾌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행실이 정상이면 됩니다.

이상한 짓 하지 않고 사랑과 진실을 품고 바로 살면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냥 정상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비록 과거에는 이 세상과 마귀에 속해서 세속적인 더러운 삶을 살았을 지라도 이제는 그런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성령을 주셔서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기오이’(ἅγιοι), 즉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성도(聖徒)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존칭인 ‘하기오이’(성도, saints)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답다!’는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성도가 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의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풍성(豊盛)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성공적이고 축복된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농부인 워싱턴 카버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땅콩을 보면서 하나님은 땅콩에다가 어떤 자연의 신비를 담으셨을 테니, 이것을 한 번 연구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땅콩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캐나갔습니다. 그 결과 땅콩을 상품화하여 화장품과 인쇄 잉크를 비롯해 무려 3백 가지가 넘는 상품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흑인노예 출신인 그는 상원의원 모임에 초청 받아 예정된 10분 동안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에 감동 받은 의원들의 계속된 간청으로, 무려 1시간 반 동안이나 땅콩 연설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강연 제목은 ‘땅콩 한 알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섭리’였습니다.

이처럼 볼품없는 땅콩으로도 3백 가지가 넘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만물 중의 으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시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길가시다가 한 맹인, 즉 시각장애인을 만납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아픔조차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병든 것이나 어려움이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질병이나 어려움을 죄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해석에 쐐기를 박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가 자랑스럽기도 하겠지만 죄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자랑스러운 육체가 아닌 지옥에 가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오히려 건강치 못한 몸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도구로 쓰여진다면 그것이 큰 축복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사명을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사명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뒹굴며, 발에 채이는 돌 하나도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겠습니까?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그에게는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인생의 참 행복과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알지 못하는 사고을 당하거나 시련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고난을 주고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이 나의 욕심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고, 시련을 허용한 것에는 분명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더듬어 보면 당시에 불필요하게 보였던 일들이 뒤돌아보면 그 당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해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과거의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졌다면, 미래의 일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루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이루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만이 행복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가 아니면 사람중심으로 사느냐는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나의 언행과 내가 맡은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다니엘 1장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니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행동방침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외에 다른 뜻에는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고 굴복하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그 삶만을 내 인생 길로 정하겠다는 다니엘의 결단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지금 이방나라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포로라고 할 때, 그 목숨은 전적으로 바벨론 왕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다니엘은 어떠한 뜻을 정했습니까?

바벨론 왕의 상에서 나오는 포도주와 진미를 거절한 것입니다.

바벨론 앙은 포로된 자 중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보이는 자들을 골라서 자기가 막는 음식으로 3년 동안 키워서 자기를 위해서 일할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거부하기 위한 뜻을 세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 때 뜻을 정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뜻이란 모두 자기의 뜻이며 또 자신의 이익을 향해서 세워져 있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7장13∼14절)

사람들은 넓은 길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자기를 세상적으로 유익되고 형통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저울질하면서 손해되고 고통스러운 길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넓은 길이고 멸망의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비록 자기 몸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으나 자기를 주장하시고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환경과 이익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살고 죽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잘 보이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다고 해서 우리 인생을 내 뜻대로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고 나가실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편에서 내 인생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다니엘처럼 세상의 환경과 이익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죽는 것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잘 보이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다고 해서 우리 인생을 내 뜻대로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의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은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우리 인생을 가장 충실히 살 수 있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평안!

주기도문 강해(6)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 출애굽기 16장4절 –

남미 우루과이에 있는 한 작은 성당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여” 라고 하지 말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라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이 기도문은 <주기도문(主祈禱文)>에 반한다고 해서 <반(反)주기도문>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반주기도문’은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목적은 그 기도대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고 삶으로는 전혀 기도의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두 여섯 가지의 청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청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시작이 나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먼저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나머지 세 가지 청원인 우리를 위한 기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의 첫 번째는 11절에 있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여기에서 “양식”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의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인데 ‘하루 분의 몫’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또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 육신이 생명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daily bread’로, 우리 말로도 ‘매일 먹는 양식’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날마다의 양식, 매일의 양식으로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셨을 때, 그 말은 구약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16장에 나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애굽기16장4절)

물론,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똑같은 표현인지 아닌지는 비교하기가 곤란하지만, 의미상으로 볼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이란 구약적 의미에서 분명히 ‘만나’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직접 양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양식을 주실 때 한없이 쏟아 부어 주신 다음, “먹을 만큼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매우 엄격하게 “당일의 분량만을” 거두도록 지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일용할 것”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이유를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신명기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마귀시험 때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 즉, <일용할 것>으로 먹이신 이유는 먹을 것 즉,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신명기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만나는 겉으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한 양식이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이 밥을 먹으나 먹는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신명기는 이 모든 것이 “먹는 것을 통하여 그 먹이시는 주체가 하늘에 계신 분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말합니다.

즉, 그들은 매일의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 떡을 먹으나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사는 것임”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에 이 구절을 인용하신 이유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40일을 금식하신 후 주님께서는 굶주리셨습니다.

사단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맥락 안에서 사단을 물리치십니다.

“내가 육체의 굶주림으로 인해 유혹받으나,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없다. 물러가라!”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양식을 거둠으로서, 하나님께서 매일 자신들을 먹이고 계심을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양식을 한꺼번에 거두어 비축하는 일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침마다 땅을 덮은 만나를 거두면서, 그들을 매일 먹이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는 이 맥락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지시하셨을 때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너희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주마” 이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기도문의 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먹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통해, 우리를 날마다 먹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란 직접적으로 우리 육신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을 뛰어 넘습니다.

좀 더 확대를 하면 식료품과 식료품을 조리하기 위한 연료가 포함됩니다.

입어야 하는 옷이나 잠을 자야 하는 공간, 매일 매일의 필요, 숨 쉬는 공기부터 물, 음식, 돈, 건강, 마음, 생각, 정신까지도 포합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일용할 양식’은 굶주린 배만을 채우는 양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하고, 결핍된 것,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인데, 우리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우리 육신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 나의 생명은 나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닌 오직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2. 오늘 우리에게(나에게만 아니라) 주옵소서!

이 기도를 드릴 때 꼭 기억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적 제한이 있는 단어로 <오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탁해 준 ‘오늘’이라는 한 시점에서 우리의 생을 위해 충분히 쌓아 두는 것으로 끝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매점매석하지 말라’는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유무상통(有無相通)’입니다.

유무상통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2장44∼45절)

초대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 다른 사람의 필요, 다른 사람의 결핍을 생각하며 분배하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호였던 록펠러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뉴욕시에 헌납해서 뉴욕시에 사는 시민은 누구나 그 시가 없어질 때까지 물 값을 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키백과 세계 인구(世界人口)7,870,495,000명(2021년 6월7일)

전 세계 인구 통계는 현재 78억 명인데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사람은 8억5천만명,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들은 25억명, 매일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3만명입니다(2021년 6월11일 현재).

올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5,759,624명, 올해 사망한 5세 미만 어린이는 3,372,374명, 에이즈 감염자 42,779,860명,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 745,854명, 올해 암으로 사망한 사람 3,643,941명입니다.

(실시간 세계 통계 https://www.worldometers.info/kr/)

우리는 오늘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렇게 굶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도 굶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맛난 음식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지만 우리 주위에는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매년 천만 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유엔 기구인 세계식량계획(WFP)은 굶주림에 직면한 기아 인구가 2020년 12월 기준으로 2억6,5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식량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남아돕니다.

남아도는 식량으로 가축을 더 기르고, 바이오 석유를 만들고 때로는 폐기처분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매년 쌀 수확량이 남아서 고민입니다.

날마다 남아서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하루에 404억 원, 1년에 15조원입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까?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 보면,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그리 되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득을 위해 어려운 나라에게 보조를 하지 않고 창고에 식량을 썩힌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식량들이 소수의 권력자들과 다국적 기업 등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도움을 주더라도 가난한 나라의 부패한 권력자들이 중간에서 거의 가로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기아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에 마냥 분노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부족한 것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 음식점에서는 손만 조금 댄 반찬들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음식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느 곳에서는 밥 한 끼, 빵 한 조각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아서 버리는 일 없도록 하십시오.

부모도 그렇게 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십시오.

밥은 생명이고 하늘입니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음식 투정하고 밥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주신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만나를 거둘 때에 남들보다 더 많이 거두어 결국은 먹지 못하고 버린 이스라엘백성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먹으십시오!

남기지 말고 버리는 일을 최소화하십시오!

더 나아가 나누어 주십시오!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 주십시오!

가지고 있다가 버리는 것은 죄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않습니다.

“가난한 것들은 일을 안 해서 그래. 일할 생각을 안 해. 게을러서 그래. 먹을 것을 주면 더 일을 안해.”

이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오늘 먹을 빵입니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난한 자들에게 너의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인간의 생명은 쌓아 두고 저장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위해 우리 자신이 수고해서 필요한 것을 취득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사랑하는 여러분!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모두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우리 이웃들이 있음을 식탁에서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이 들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있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혼의 고갈 가운데 있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 구조 가운데서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해서 울고 있는 이웃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기도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성만찬을 고대하는 기원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 성만찬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을 근본적으로 충족시켜 줄 참된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고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평안!

주기도문 강해(7)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마태복음 18장 23∼35절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우리를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인간에게 가장 실질적이고 절대한 필요한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장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못지않게 중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살기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으며,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사함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다 불완전한 사람이요, 허물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한 마디로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누구나 죄인인줄 알고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과 함께 인간 편에서 참으로 현실적인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구는 신앙생활의 시작의 기초이고 영적 거듭남의 원천입니다.

죄의 용서는 구원 이후 신앙의 성화에 이르는 거대한 신앙의 그루터기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구하듯 죄 용서함의 기도도 매일 구해야 합니다.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구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서 받는 것과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마태복음 18장(21〜35절)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왕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즉 용서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만 달란트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달란트(Talent)는 저울로 무게를 다는 최대의 단위를 말하는데, 신약시대에는 1 달란트의 무게는 약 20.4kg 정도 되었고 6천 데나리온(드라크마)에 해당되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장정이 6천일 동안, 그러니까 하루도 안 쉬고 16년 5개월 10일 동안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러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인가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장정이 164,383년 하고도 반년을 더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입니다.

얼마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습니다.

이와 비교해보면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에게 이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했습니다.

이 빚을 자기의 능력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죽어도 못 갚습니다.

그런데 왕이 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죄, 하나님께 대한 빚의 무게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죄의 무게인데, 하나님께서 값없이 탕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 받은 우리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장정이 백일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하루에 5만원을 일당으로 받는다고 한다면 5백만 원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빚진 자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그 빚을 안갚는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자기는 일당 5만원으로 하면 3조원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5백만 원 빚진 자에게 탕감은 커녕 무자비하게 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화가 나서 그 일만 달란트를 다 갚도록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비유의 끝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은 주기도문에 이어 나온 예수님 말씀입니다.

여기에도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먼저 이웃들을 용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흔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가 2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마르티아>인데, 이 단어는 ‘과녘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로 어떤 목표를 벗어나거나, 미달(未達)된 것을 뜻합니다.

누가복음은 <죄>를 이 <하마르티아(המארטיה)로 기록했습니다(눅11:4).

누가는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성경을 읽게되는 수신자인 헬라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죄>를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οφειληματα)>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헬라 말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이 쓰던 아람어였습니다.

마태는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수신자인 유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빚(οφειληματ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경제적 채무’를 뜻합니다.

채무란 즉 빚은 당연히 갚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채권자에 의해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수도 있습니다(마 18:24~34).

일반적으로 기업이나 사업자들 간에는 종종 채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때 빚을 진 기업이나 사업자가 원만하게 채무를 상환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 할 때는 부도처리가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빚은 살림 밑천이라고 말은 하지만 크든 작든 빚으로 인해 겪는 스트레스와 고통은 여간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빚 없이 살고 싶지만 때로는 주택 구입, 자녀 양육 사업 실패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더러는 빚 때문에 치가 떨리는 사람도 있고, 악성 부채는 우리에게 상당한 심적 부담을 갖게 합니다.

오죽하면 빚을 감당 못하여 목숨까지도 내 던지는 일도 생기겠습니까?

간혹 급할 때는 빌려 쓰고서 제때 못 갚다보니 서서히 빚진 자의 마음이 무디어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좀 더 이 기도의 의미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기도는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에 대한 채무를 면제하여 주는 규례가 있습니다.

매 칠 년마다 지키는 안식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족이 빌려 가서 갚지 못하는 ‘빚’을 탕감해주어야 했습니다.

신명기 15장2절입니다.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심지어 돈을 주고 사 온 종이 동족이면 면제년에 그들을 놓아주고 그들에게 후히 주어 보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종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값없이 속량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면제년이 가까워져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꾸어주어야 합니다.

신명기 15장9절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물론 악의적인 마음으로 타인의 재물을 취할 생각으로 빌리는 것을 거부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말 가난하여 먹을 것을 구하는 동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와 죄 용서에 대한 기도는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일용할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을 가능케 할 만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용서라고 말하면 물질적인 탕감에 대해서는 예외로 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년의 규례를 배경으로 ‘빚진 자에 대한 율법적 의무를 다한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에 대한 탕감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일반적인 죄와 더불어 물질적인 부분까지 포함한 용서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이 아닙니다.

전제(前提)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라고 하시지 왜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안에 미움이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기도에서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 잘못한 자, 상처 준 자를 용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야박하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는 전제조건(前提條件)을 붙여 놓으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뜻일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그 횟수에 따라 하나님도 용서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런 해석을 하게 되면 우리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공로사상이라고 합니다.

공로사상(功勞思想)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한 행위를 하고 어떤 노력을 해서 하나님께 택함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선은 인간적인 도덕적인 기준에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뼛속까지 부패한 죄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장 8〜9절)

그렇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容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참된 회개(悔改)이고 용서의 근거는 회개를 받으시고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원은 우리의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의역을 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죄도 역시 용서해주십시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양해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준다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를 준 사람과 친구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잘못된 일들을 곱씹지 말고 기억 속에서 떠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시작됩니다.

삐뚤어진 우리 마음과 상처를 가지고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 용서의 행위’가 진정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용서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허물투성이지만 우리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면 우리는 정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당연히 인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백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잃었을 때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미경을 들이대며 나의 죄를 트집잡는 분이 아니라, 나의 방향이 올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실 뿐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지금 사함을 받지 못해서 용서받기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의 은총이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허물과 죄투성이인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죄사함의 은총을 끊임없이 누리면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상기해야 하고 늘 형제들을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조그마한 일에 분노하고 원한을 품습니까?

주기도문을 하면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 가증스럽습니다.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받는 자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인권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평생 헌신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아십니까?

만델라는 1918년 남아공 남쪽 지역의 토착 템부족 족장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일생을 건 흑인 인권운동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합법적인 투쟁을 위해 변호사 자격을 따고, 남아공 최초로 흑인 전용 법률상담소를 열어 조직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참가했고, 1956년에는 반역죄로 155명의 인권 운동가와 함께 체포됐습니다. 1960년 3월 69명의 흑인이 경찰에 살해된 ‘샤프빌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그는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1962년 다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범죄 혐의 추가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46세때였습니다. 그후 27년동안 감옥에 있다가 1990년 당시 대통령이던 FW. 드 클레르크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3세의 노인이었습니다.

1990년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 앞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무력으로 백인 정권을 타도하자’는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동료들의 요구였습니다. 만델라는 이 요구에 대해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이룩해 놓은 것에 감사를 표한다.”고 공언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4년 후, 1994년 4월27일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만델라는 그해 5월27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공간들을 채울 다리를 놓을 시간이 왔습니다. 새 시작을 할 시간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저희는 마침내 법적인 평등을 이뤄냈습니다. 저희는 모든 사람이 가난, 탈취, 고통, 성적 차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협동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국의 조화, 재건과 새로운 세계의 협동을 위해 반드시 협력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에 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합시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백인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함께 잘 살아가는 새로운 나라, 여러 색깔로 이루어진 무지개가 아름답게 빛나듯이 아름다운 ‘무지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과거사 해결의 원칙으로 응했습니다. 이를 위해 설립한 법률의 이름도 ‘국민 통합 및 화해 촉진법’이었습니다. 이 법에 따라 6800명의 가해자가 진실을 고백하고 사면을 받았습니다. 만델라는 고백하지 않은 가해자들도 끝내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은 기득권을 잃었지만 ‘피의 보복’을 막아 주는 지도자로 만델라를 받아들였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백인 정권의 직전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임명했습니다. 흑인 탄압의 핵심이었던 정보책임자, 자신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던 검사를 자택으로 초대해 정중히 대접했습니다. 백인 교도관 세 명은 대통령 취임식장에 초대해 귀빈석에 앉혔습니다.

흑인 단체가 백인 문화를 대표하는 럭비 대표팀 해체를 요구하자 오히려 만델라는 흑인이 단 한 명뿐인 럭비대표팀을 찾아가 격려했습니다. 감동한 백인 선수들은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에서 결사적으로 뛰어 예상을 깨고 우승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결승전이 끝나자 경기장에 모인 흑인과 백인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넬~슨, 넬~슨”을 연호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용서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자기와 자기 민족을 박해한 그 백인들을 용서했기에 남아공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돌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앞에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했습니다.

용서가 복음이고, 용서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가슴에 품고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 

주기도문 강해(8)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마태복음 4장 1∼11절 –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기도는 모두 여섯 가지의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1)하나님의 이름, (2)하나님의 뜻, (3)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시작이 나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먼저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 다음 세 가지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향한 첫 번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양식”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두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세 번째 기도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악에서 건져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한 세 번째 기도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입니다.

<시험>이라고 번역된 말은 예수님이 평소에 쓰던 아람어로는 타지바(tajriba)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페이라스몬(πειρασμόν)입니다.

이 말은 시험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유혹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시험’ 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테스트(Test)’의 의미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성장을 위해 연단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혹(Temptation)’의 의미로 죄로 이끄는 사탄의 공격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은 시험이라는 단어가 그 의미에 따라 ‘Test’ 또는 ‘Temptation’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이나 성경 원문인 헬라어 성경은 서로 구별 없이 ‘시험’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문맥으로 그 의미를 가려내야 합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로 읽어야 합니다.

1. 죄의 유혹

죄의 유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죄에 대한 유혹은 우선 안으로부터 옵니다.

즉 우리 마음으로부터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성경 예레미야 17장에는 “만물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렘17:9).

인간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부패해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마음이 최대 유혹자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이란 분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사탄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사사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맨손으로 사자를 죽이고 나귀 턱 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일 수 있었던 능력자였습니다.

그런 삼손도 자기 마음에서 올라오는 죄의 유혹은 이기지 못해 블레셋 여인 들리라를에게 빠져서 결국은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또 유혹은 밖으로부터도 옵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유혹을 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4장에도 보면 3절에서 마귀를 가리켜 아예 ‘시험하는 자’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자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행복을 시기합니다.

일개 티끌 덩어리에 불과했던 존재(창2:7)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가 된다는 것은 사탄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한 때 영광스런 천사장이었으나 땅으로 쫓겨나고 흙이었던 인간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류를 고질적으로 증오합니다.

어떡해서든지 하나님과 이간질시키려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이간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전 단계인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교묘하게, 또 과감하게 집착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유혹할 정도니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에는 그가 즐겨 쓰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첫째, 갓 믿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사탄은 은혜의 자녀가 태어나면 그를 죽이려듭니다.

사탄은 새 피조물에 앙심을 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늘어나고 왕성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귀는 생명의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칼 날로 도려내려합니다.

그러므로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중보 해줘야 합니다.

둘째, 은혜 받았을 때입니다.

마귀는 도적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장10절)

도둑은 있는 집을 털지 없는 집을 털지 않습니다.

해적선은 보물 실은 배를 습격하지 빈 배를 습격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마치자 바로 시험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는 것은 마귀의 대적자가 되어간다는 뜻이기에 마귀는 어떡해서든지 받은 은혜를 와르르 쏟아버리게 만듭니다.

또한 배부르게 먹고 난 뒤에 졸음이 쉽게 오듯이 영의 양식을 잘 먹고 나면 자족감에 나태해져 졸기 쉽습니다.

이때 마귀가 쏜 화살이 갑옷의 솔기 사이로 꽂힙니다.

보물을 싣고 돌아 올 때 해적선을 주의해야 합니다.

셋째, 승리하고 난 뒤입니다.

전투 후 갑옷을 벗어버린 군인에게 적군이 기습하듯 마귀는 큰 시험을 이긴 후, 큰 목표를 달성한 후에 기습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마어마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지만 승리감에 도취해 아이성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 싸움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700명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승리 직후 이세벨이라는 사탄 같은 여자 말 한마디에 ‘나를 죽여 주소서!’하며 자기 연민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고 났을 때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수를 뻗칩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오르막길에서 보다는 내리막길에서 자동차 사고가 더 많이 난다고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를 향해 올라갈 때는 깨어 있다가 목표 달성 후에는 방심하고 나태하여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되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12절)고 했습니다.

넷째, 한가할 때입니다.

승리하던 다윗이 넘어진 것은 한가한 때였습니다.

다윗이 굳이 전쟁에 직접 나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라가 견고해지자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그는 한가롭게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저쪽 아래서 목욕하는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마음에 사탄이 유혹의 화살을 쏜 것이 적중하여 다윗은 죄를 짓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한가할 때 마귀 화살이 날아옵니다.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알맞은 휴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영적인 백수가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바쁘다고 교회 사역을 내려놓고는 마귀 화살에 맞아 허덕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 사역이란 사실 교회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면이 있습니다.

다섯째, 혼자 일 때입니다.

사탄은 교회에 꼭 붙어 있는 사람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혼자되게끔 부추기거나 흩어 놓습니다.

교회가 싫어지고, 믿음의 사람과의 교제가 싫어지고, 혼자서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위험합니다.

혹시 그런 마음이 있다면 사탄이 유혹의 화살을 쏘기 위해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와에게 사탄이 접근한 것도 남편과 따로 떨어져 혼자 있을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장12절)

코로나 19로 인해 성도들이  대면예배금지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곤 합니다.

이렇게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 성도들의 믿음이 위협받습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때입니다.

혼자서 신앙생활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때 예전보다 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죄가 유혹해 올 때 자주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딱 한 번만’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즐겨 쓰는 낚시밥입니다.

사탄은 ‘열 번, 백 번’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한 번만’이라고 점잖게 제안합니다.

그러나 한 번은 반드시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입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어때…”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타협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로마서12장1절).

그러면 도대체 언제가 사탄의 유혹이 없는 때일까요?

없습니다!

마귀는 두루 다니며 부지런히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장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죄의 유혹,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만약 스스로 이길 힘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 때때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해 기도헤야 합니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에게 받으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장 1〜3절)

마귀는 사십 일 금식한 예수님께서 배고프다는 사실을 알고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템프테이션(temptation),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도움없이 네 자신의 힘으로 메시야가 되라는, 구원을 이루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마귀는 그 유혹으로 예수님이 죄를 짓도록 시험했습니다.

3. 시험에 들지 않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생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어 이제 좀 편안할까 하면 금방 그 다음의 문제가 터집니다.

이처럼 그 다음의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매일매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때문에 끊임없이 불평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인생살이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절로 굴러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에는 늘상 시험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처럼 유혹에 놓여 있는 그 자체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매일 매일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12절)고 했습니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문제없다. 나는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탄탄대로로만 걸어갈 수 있다.”

그렇게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혹의 시험은 여러 곳으로부터 옵니다.

외적인 현상들로부터 유혹이 찾아들어 옵니다.

화려한 물질문명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큰 유혹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이나 부요함이 둘 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만듭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그가 나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지극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적인 유혹의 시험은 외적인 시험보다 사실 더 무섭습니다.

의심하는 것이 시험이 됩니다.

불신하는 것이 시험이 됩니다.

교만한 성격이 시험이 됩니다.

게으름이 시험이 됩니다.

특히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가장 큰 내적 유혹의 시험은 의심과 불신의 시험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축복의 시험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입니다.

사탄은 욥을 올무에 걸어 파멸시키려고 그의 재산을 모두 앗아갑니다. 그의 자녀도 모두 빼앗아 갑니다. 동방의 부자였던 그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욥에게 악창이란 병으로 그의 몸을 쳤습니다.

몸이 가려워 견딜 수 없는 욥에게 사탄은 아내를 통하여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유혹합니다. 친구들은 위로가 아니라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회개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사탄의 유혹을 하나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물을 앗아감으로 하나님을 불평하라는 마귀의 유혹에 대해 오히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유혹할 때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하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결국 그는 사탄의 유혹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유혹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첫번째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험에 들지 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혹의 시험은 기도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란 적을 알고 자신을 바로 알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비결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태복음 26장4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는 40일 금식기도 하신 예수님을 찾아와 세 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적 시험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명예의 시험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영적인 시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육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영적전쟁을 할 때 성도들의 유일한 공격의 무기는 ‘성령의 검’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사탄을 공격하십시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려운 이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시험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

주기도문 강해(9)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 에베소서 6장 11∼18절 –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탈을 쓰고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한 잔인무도한 인명살상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천륜적, 반인륜적 패륜과 불륜의 사회라고 할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 줄을 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기억에서 조차 희미해진 고재봉 대대장 일가족 도끼 살인사건, 김대두 17명 연쇄살인사건, 우범곤 순경 50여명 무차별 총기 살인사건, 지존파와 막가파의 엽기적 살인사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발생한 미해결 여성 10명 연쇄 살인사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저지른 강호순 여성 연쇄 납치 살인 사건, 2004년 서울 서남부 일대 정남규 연쇄 살인사건, 가깝게는 21명의 죄없는 목숨을 토막살인한 유영철 살인사건과 대학교수의 부친 살해사건, 과천 대학생 부모 토막살해 유기사건 등 반천륜적, 패륜적 살인사건 등은 기억만으로도 전율케 하는 천인공노할 잔혹한 살인사건들입니다.

최근에도 아들이 어머니와 형을 죽이고 뻔뻔하게 장레식장에서 조문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청부 살해계획을 했다가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거나 동반자살하고, 어머니가 딸을 죽이는 등 반천륜적 사건들이 줄에 줄을 잇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악한 일이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수 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런 악이 자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는데 왜 이런 악한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활개를 치고 있을까요?

1. 악과의 전쟁

오늘 말씀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했을 때 ‘악’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을 심리적 현상으로나 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악의 실재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악령(惡靈)의 존재에 관하여 오해를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의 힘은 언제나 인격화되어 나타납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악한 자가 됩니다.

악의 힘이 인격화된다는 것은 인간이 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악의 힘에 사로잡힐 때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두 살 이하의 어린아기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헤롯 왕이 그랬습니다.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죽인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유태인들을 600만명이나 학살했던 나치의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우리나라를 36년 동안이나 짓밟았던 일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체실험하며 죽였습니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또 어떻습니까?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손자 김정은의 악랄함도 보십시오.

탈레반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보십시오.

얼마나 잔이한지 모릅니다.

이처럼 악은 무시무시한 괴물입니다.

악에 사로잡히면 어머니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보이지 않습니다.

악은 단순하게 하나의 힘이나 세력이 아닙니다.

‘악’(πονήρος)은 인격화된 ‘악한 자’(theEvil One) 곧 사탄(σατάν ‘적’, ‘원수라’는 뜻 ), 마귀(διάβολος ‘참소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악한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죄로 말미암아 아담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귀는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며 죄를 짓게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게합니다.

술 취하게 합니다.

방탕하게 합니다.

거짓말하게합니다.

이간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세상에 취하도록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합니다.

진리를 좇지 않게 하고, 불의하게하고, 경건치 못하게 합니다.

악을 품게 합니다.

미워하게 합니다.

싸우게 합니다.

서로 원수 맺게 합니다.

세상의 악한풍습을 좇게 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마귀는 이렇게 온갖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죄를 통하여 타락시키고자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8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죄악으로 공격해 오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해야 합니다.

싸워 이겨야 합니다.

현대전은 어느 쪽이 최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가려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서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컴퓨터로 조종하는 최첨단의 무기를 개발하여 보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서 군사들의 무장 또한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대로 무장하지 않고 전선에 투입되면 그것은 곧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전쟁입니다.

곧 하나님의 군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사탄의 군대인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단체전이 아니라 개인전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악한 귀신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이기면 살지만 지면 죽습니다.

우리의 영적전쟁은 이기면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어내지만 지면 지옥의 유황불못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받으며 살아야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영적전쟁터에서 반드시 살기위해 이겨야만 합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우리보다 앞서 달려간 훌륭한 믿음의 증인들의 위대성은 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재난·질병·죽음에서 보호받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많은 환난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의 힘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대상에게 무서운 증오와 복수심에서 보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증오와 복수심에서 구원받아 원수를 자기의 아들로 삼은 분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기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원수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욕을 하지 않고 왼편 뺨까지도 돌려댄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선으로 악을 이긴 승리자들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누구나 악에 빠져 버릴 때 완전히 동물적인 흉악한 괴물로 바뀝니다.

악이 뿌리를 내리고 전진 기지를 구축할 수 있는 요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습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온갖 악의 발생의 진원지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세속문화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의 함정이 있습니다.

문화라는 화려한 옷을 입은 악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베드로전서 5장8절).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인간의 욕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온갖 요소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나 그의 꿈을 실현했을 때, 그것은 악의 함정이었습니다.

그 함정에 빠져 그는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었던 고귀성·신성한 긍지·도덕성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점점 더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점점 더 거룩한 삶 점점 더 성화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삶이 또 영적인 삶이 더 선해지고 거룩해 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우리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의 말씀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1〜13절)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절/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에베소서 6장에는 마귀의 세력이 얼마나 위험한 실체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세력은 ‘정사’와 ‘권세’, ‘세상 주관자들”로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의 세력도 천사들과 같이 힘과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깡패나 마약 밀수단도 힘과 조직을 가지고 운영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5장8절).

게다가 그 존재들은 매우 사악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 대적을 ‘어두움의 주관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들이 매우 사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악의 영’입니다.

그들은 악의 본부로부터 파송된 영들입니다.

우리 대적은 어둠을 좋아하는 악한 존재들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매우 교활합니다.

사단은 하와를 넘어뜨렸던 ‘뱀’과 같이 치밀한 궤계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의 약점들을 너무 잘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불리한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이 참 강합니다.

그래서 그 자존심 때문에 아무리 어려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는 정신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외면하고 모든 일을 다 자기 스스로 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 즉 사탄과의 싸움에 있어서 필요한 전신갑주는 꼭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신갑주를 받아 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것만이 사탄과의 싸움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운명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악한 영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역사하는지 아십니까?

악한 영들은 우리를 귀신들려 미치고 합니다. 

살인하게 해서 인격을 파괴합니다.

간음합니다.

죽이도록 미워합니다.

시기합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술 취하게 합니다.

방탕하게 합니다.

자살하게 합니다.

온갖 병으로 고통당하게 합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게 합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하게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게 합니다.

잠이 오지 않게 합니다.

타락하게 합니다.

신앙을 버리게 합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게 합니다.

이처럼 악한 영들은 우리를 파괴하하려고 합니다.

그레서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은 쉽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은 보이지 않게 다가와서 우리의 약점을 공격합니다.

약점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하고 거역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한 마귀의 정체를 바로알아야합니다.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과 싸워야합니다.

그리고 꼭 이겨야만 합니다.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첫째로 진리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로 우리는 무장을 해야 합니다.

① 우리는 죄인이다. ②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③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셨다. ④ 예수님은 나의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셨다. ⑤ 예수님은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⑥ 예수님은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 ⑦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

둘째로 의(義)로 무장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한일서 1장5∼7절).

빛은 의를 말하고 어두움은 죄악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빛되신 하나님과 같이 우리의 행실이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곧 의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곧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빛가운데로 나가야합니다.

의로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복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자신이 무장하고, 이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전하게 되면 마귀는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사는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해야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영들이 공격해 올 때 강한 믿음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구원의 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으니 마귀는 그를 공격해서 넘어뜨립니다.

우리는 악한 마귀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고 천국에 장차 모두 들어가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섯 번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합니다.

마귀의 수많은 공격 속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며 기도를 하고 마치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마귀의 공격을 단호하게 막고 물리치는 검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일곱 번째로 수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질하는 귀신을 내쫓고 하신 말씀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마가복음 9장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귀신들을 물리쳐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일서 3장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고 하였습니다.

예소님께서 안식이레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가 에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마가복음 1장24절)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꾸짖엇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그러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1장 26절)

우리가 악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악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귀를 멸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귀를 멸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는 나 한 사람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절망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고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바라보면서 드리는 희망의 간구입니다.

로마서 13장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만약 지금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시간이 낮이 아니고 밤이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시간은 밤이 아니고 낮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 살면서 악과 타협하지 않고 빛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오고 있는 낮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

주기도문 강해(1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마태복음 6장 9∼13절 –

주기도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하고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가치와 깊은 뜻을 생각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모든 기도의 표준이며 근본입니다.

주기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은혜가 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 속에는 굉장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가장 가까운데 계신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애원하고 부탁하고 아빠라고 부를 때,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아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거룩, 공의, 자비, 긍휼, 사랑 등 다양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품은 <거룩(קדש-카데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공의가 있고 자비가 있고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전하셨던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이었습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있고 더불어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섬김과 나눔이 있다면 우리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있고 더불어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들의 섬기는 사랑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죄 용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세 번째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입니다.

‘뜻’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첫째로 세상의 구원입니다.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둘째로 성도의 성화(聖化)입니다.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점차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성결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셋째로 성도의 풍성(豊盛)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성공적이고 축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풍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네 번째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직접적으로 우리 육신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양식’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원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성만찬을 고대하는 기원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 성만찬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핍을 근본적으로 충족시켜 줄 참된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고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다섯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본문을 원어에 가깝게 의역을 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죄도 역시 용서해주십시오.”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자신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를 가슴에 품고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여섯 번째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유혹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악’은 단순하게 하나의 힘이나 세력이 아닙니다.

‘악’은 인격화된 ‘악한 자’ 곧 사탄, 마귀입니다.

마귀는 온갖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죄를 통하여 타락시키고자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죄악으로 공격해 오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야 하며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것만이 사탄과의 싸움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악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귀를 멸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귀를 멸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였습니다.

주기도문의 여섯 가지 간구를 마치고 주님을 향한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것은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마태복음에서는 괄호 안에 놓았고,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아예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본문을 괄호 안에 넣은 이유는 신약 성경의 원문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있는 사본 중에 이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사본이 수 백 개가 되는데 그 사본 가운데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되고 또 초대 교회 때 널리 읽혀지고 인정을 받았던 사본에서는 이 송영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대에 기록된 사본들 가운데서는 이 영광송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광송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원래의 원문에는 없었으나 초대 교회가 나중에 첨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오래 전부터 유대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찬양으로 마무리한 것이 시편인데, 시편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간구과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부르짖다가 그 마지막은 ‘할렐루야’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송영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주기도문의 마지막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송영부분을 주기도문의 마무리 송영으로 고백해왔습니다.

1.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송영 부분에서 제일 먼저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처럼 통치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국가를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갈 곳이 아니라 이미 ‘너희에게 와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 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혹은 천국(天國)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험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똑같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이는 죄와 사망의 나라에 살고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은 앞으로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오실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올 그 나라 뿐 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 가운데 임하는 나라를 내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이 땅 가운데서 천국을 경험하려면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 내가 속하는 모든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함으로 따라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속이고 짓밟으며 돈과 성공과 일류만을 추구합니다.

섬기는 자가 되라는 가르침 대신 어떻게라도 머리가 되려는 삶을 살고있습니다.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는 말씀에는 ‘아멘’하면서도 실제로는 강자가 가진 힘과 권력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대신 “요즘 유행은 무엇일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며 세상을 좇아 소비와 향락의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녕과 인생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복음입니다.

반쪽짜리 구원이며 바로 왜곡된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십시오.

나의 입술로가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십시오.

2.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두 번째 송영은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입니다.

권세는 두나미스(δυναμις) 곧 ‘파워(power)’입니다.

파워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모든 파워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은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린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입니다.

권세는 통치의 힘이며, 이 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능력(힘)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오면 질 수밖에 없지만 권세는 아무리 자기보다 힘이 더 강한 자라도 그 권세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기록한 예수님의 권세를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요한복음 1장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2∼13)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통치 주권의 회복의 선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모든 인간들 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나아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선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의 법, 순종의 법, 섬김의 법, 공의와 평화의 법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자녀는 그 부모와 동등한 존재입니다.

부모의 판단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녀는 그 집안에서의 모든 행동에 제약이 없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는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①생육하라! ②번성하라! ③땅에 충만하라! ④땅을 정복하라! ⑤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는 5가지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코 없으리라”(19절)고 말씀하십니다.

시험과 악에서의 해방의 능력도 주님으로부터 받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의 능력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의 힘을 빌어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힘을 빌어 사는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말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아 주의 능력으로 일했으며, 일이 성취될 때마다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주님께만 의존하여 인생을 살고자 할 때 그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살아가십시오.

3.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세 번째 송영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세 가지 원칙 중 하나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잘 모릅니다.

‘영광’(榮光, δοξα 독사)이라는 말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말합니다.

<영광>이란 최고로 빛나는 것입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최고로 선한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최상의 기쁨 최고의 명예를 말합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것은 그런 최고의 칭찬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기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기도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좋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라면 그 기도는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존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영광이 가득하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 중에 ‘평화’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짐승들의 여물을 담는 통인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이처럼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 이름이 영원히 높임을 받고 영원히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며, 그리스도의 이적과 그의 인격,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의 결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변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잠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불변한 권세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 뜻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 그리고 사탄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송영은 위대한 찬양인 동시에 기도와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멘,אמן, αμην”은 히브리말로 헬라어로도 역시 ‘아멘’으로 발음합니다.

“아멘”은 ‘진실, 충성, 믿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아멘>은 “지금까지 드린 기도가 진실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고백입니다.

‘아멘’은 문서를 모두 작성하고 나서 확인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아멘은 우리의 기도 내용이 진실하다는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아멘>에는 우리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믿음도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믿음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을 믿고 ‘아멘’하십시오.

순간순간 우리의 생애 속에 놀라운 사건이 매일 매일 일어날 것입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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